긴 터널을 끝에
가슴속에 있던 많은 것들을 태우고 눈을 뜬 첫날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개발 인생 대부분은 성공에 대한 열망과 달콤한 유혹
인간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무시와 폭언
보상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상당한 위험 그리고 끝내 도달하지 못한 목표..
여름에 춥고, 겨울은 더 추운 개발실..
해가 바뀌는 불안보다는, 밥값 걱정 사라지는 것에 행복해하며
따듯한 옷과 좋은 음식에 기뻐하고,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춤을 추는 단세포
매년 크리스마스 어딘가 사무실에서 개발 완료 보고서를 쓰면서 내년에 뭐 만들지 생각하는 것에 반복...
개같은 성격과 개같은 성실함 때문에 목에 걸고 다니기 과분한 직함이 생겼고
11년 차 개발자가 되었지만 돌아보니 허무했다.
같이 일 하자는 사람은 많았지만, 결국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기술이라는 점이 슬펐다.
시간이 지나면 쓸모 없어지는 알량한 지식이란.. 누구나 공부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누군가 한명 배에서 내려야 한다면 가장먼저 지목당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내 배를 만들었다. 사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도 멋지긴 한데..
요즘은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배의 인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10년.. 처음으로 사람에게 욕심이라는 게 생겼다.
긴장하고 당황했고 고민했지만 판단이 흐려졌고 실수했고 절망했다.
적당히를 모르는 것이 나라는 인간의 최대 단점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나에게 어느정도 권위가 있다는 것도 망각했고
말에 무게가 있다는 것도 망각했고, 사회적 위치도 망각했고, 아주 그냥 20살 애새끼 같았다.
그렇게 망나니처럼 굴다가 눈에든 사람을 잃어서 가슴이 아프다.
평생 나도 처음해본 잘못이라 난감하고 이해를 구하기 난망하여 왜그랬지 하고 생각해보지만..
사실 나는 태생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내 본성이 발현할 상황이 없었던것 아닐까?
여태껏 시시하고 재미없었던 이유가 대충 흐름에 맞춰 연극을 해왔기 때문이구나 싶다.
평소에 사람이라도 만나볼껄.. 그렇게 잘하지도 못하는 개발에 미친놈 소리 듣는게 뭐 좋은거라고..
언젠가 사과할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변수를 바꿔봐도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며,
요 몇일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긴 터널을 끝에 머리가 맑아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걱정들, 나를 어지럽게 하는 많은 것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착한 어른, 부채 의식, 책임감, 돈
이 모든 것이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자왈 맹자왈 어차피 술처먹으면 개가되는 것을..
잠시나마 남들처럼 살아야 하나? 참된 어른이 되어야 하나? 하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나는 놀이터에 떨어진 인생이었다. 10년간 간절히 원했던 기술이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이것저것 하다 보니
배에 기름이 끼었다. 쓸모없는 이타심이나 부채 의식이 생겼고 반반치킨처럼 살짝 미쳤었나 보다.
태생이 광대인걸 잠깐 절었다. 이제 광대에 절름발이인가..
나는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다. 그것을 확신한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 다 태우고나니 오만인지.. 뭔지.. 이생각 밖에 남질 않더라.
머릿속에 많은 if가 있다. 하지만 배에낀 기름 때문에 실패가 두려워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참으로 멍청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이제 잡생각은 접고 내가 19살에 꿈꿨던 것들을 증명하며 살아야겠다.